영상을 보며 저자에게 “그래서 능력주의의 문제점은 알겠는데 네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뭐야?”라고 묻고 싶었는데, 능력주의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패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바뀌는 것
결국 평등해야하는 이유가 설득되고 행동화가 이루어지려면 평등에 대한 스토리가 담긴 이데올로기가 작동해야하는데 규범적인 종교 이데올로기에 설득되는 사람도있고 이해관계 중심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설득되는 사람도있고 합리성 기반인 과학적 사실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설득되는 사람도있어서 어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믿는 사회를 만들기위해서는 유전자를 조작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불가능한 것이고 자신이 믿는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으며 이 물리적 세계에서는 공동선이 가능하다고해도 엄밀히 말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며 모두가 동의하거나 동등하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공동선이 실천되는 것 뿐이겠죠. 평등과 같은 공동선은 일시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풍요로운 시기를 누릴 떄 잠시 찾아오는 유행과 같은 것이고 단어 그대로의 공동선이 이루어지려면 먼 미래에 매트릭스처럼 가상현실을 만들어내 개인하나하나가 자신의 세계에서 신이되는 세계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치 모든것이 자신의 실력으로만 된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사람들을 쉽게 깔보고 무시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이것도 못해? 나도 하는데 왜 너는 못해? 노력을 안해서 그래 등등... 역겨워요 그러다가 좀 힘들어지거나 망하면 죽는소리는 래퍼 수준
온라인상에서도 서로간에 존댓말을 쓰며 서로간에 존중을 하던때가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성별로 나뉘어 싸우고 정치성향으로 나뉘어 싸우고 사이트 별로 나뉘어 싸우는게 문득 떠올랐습니다. 점점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선 항상 화가 나있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고... 성과주의 사회에서 뒤에있는 사람들이 익명에 힘을 빌려 말하고 화내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이 점점 늘어만가는 현실이 공동선이라는게 존재하던 인터넷 문화 시절과 지금의 현실같았습니다.
최대한 '모두'가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북유럽식 복지주의(이것도 너무 낡은 패러다임 같이 느껴지네여), 혹은 기본소득제등이 거론되고있죠. 확실한것은 일부가 독식하는 세상을 모두가 함께 하는 세상으로 변모해야한다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정의는 무엇인가, 인류애다.
마이클 샌델의 지적은 구구절절 맞는 얘기지만,문제의 해법으로 제시한 방법은 좀 와닿지 않는다.
인류는 샌델 교수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온순한 동물이 아닌 것 같다.
협력과 소통을 통해 진화했지만,폭력성과 탐욕이 협력과 소통을 압도할 만큼 강한 종이기도 한 것 같다.
최윤아 기자의 서평 중에 상당부분을 가져왔다.원문은 링크를 참조
“귀족적 특권과 달리 능력주의적 성공은 스스로의 자리를 스스로 얻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이런 관점에서,부자가 된다면 귀족정보다 능력주의 사회가 더 낫다”반대로 능력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더“맥빠지는 일”이다.귀족정 사회에서 가난은 내 책임이 아니지만,능력주의 사회에서는“재능과 야심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능력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단순한 부 이상의 것을 향유하듯,빈자도 단순한 궁핍 그 이하를 겪어낸다.바로모멸감과절망이다.
능력주의가 부자에게는오만을,빈자에게는절망을 주는 방식으로 쌍방향 폭정을 저지르며 민주주의 공동체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고 샌델 교수는 지적한다.
샌델 교수는“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라고 질문한다.능력에 상당한 지분을 가진‘재능’이란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이고,내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는 것도 역시 우연의 산물이기에“능력에서 비롯된 혜택을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는 판단은 실수이자 자만”이라고 지적한다.
이‘오만’이 공동체에 필수적인 사회적 연대감까지 약하게 만든다는 데까지 나아간다.자신의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이뤄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도움을 줘야 할 이유도,받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를 온몸으로 흡수한‘패자’는 사회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한다.이들은 공론장에 참여해 불평등한 상황에 목소리를 내지 않거나 주저하게 되고,이 때문에 공론장은 소수 엘리트 목소리로 채워지며‘공동화’된다고 샌델 교수는 주장한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된다....능력주의의 이상은‘이동성’에 있지‘평등’그 자체에 있지 않다”
능력주의 찬성론자들은 이‘이동성’이 불평등 단차를 줄인다고 반박하지만, ‘이동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미국의 대학입시 전형을 바꾸었으나“노동계급과 빈민층 자녀들은1954년에 비해 오늘날 빅3에 진학할 가능성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능력주의가 이미 사회에 광범위하게 공유된 원칙이라 하루아침에 폐기하기는 어렵다.샌델 교수는 능력주의를 개보수하는 선에서 대안을 제시한다.일단 과열된 입시 경쟁으로 오히려 사회의‘단차’를 벌리고 있는 교육부터 건드린다.일정수준 이상의 능력을 갖췄다는 제비뽑기로 합격자를 선발하는‘유능력자 제비뽑기’방식을 도입해‘능력’의 폭정을 약화시키자는 것이다.→한국사회에 제비뽑기 입시를 한다면 어떨까?유래없는 난리가 나겠지!구미사회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우리 사회에서는 절대 적용할 수 없는 방안이다.
또 모두가 대학에만 몰리지 않도록 노동으로 사회적 가치와 기여를 인정받도록 하자고 한다.→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성공한 사람들의 겸손은 오늘날 사회 경제적 삶에서 통 드러나지 않는다. 포퓰리즘의 반격에 있어 하나의 불씨가 된 것은 노동계급 사이에 널리 퍼진 엘리트가 우리를 깔본다는 인식이었다.*포퓰리즘: 이는 다수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다수의 참여와 지배를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 포퓰리즘에 대해 대중을 전면에 내세우고 대중적 지지만을 좇는 '대중영합주의'로 보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① 〖美史〗 인민당(People’s party)의 주의〔정책〕; 〖러史〗 (1917년 혁명 전의) 러시아 인민주의.② (p-) 기성의〔지적인〕 것에 반대하는 정치운동〔철학〕《비정통적인 정책 제기로 대중에 호소함》.③ (p-) 풀뿌리 민주주의; 노동자 계급의 적극적 행동주의; 만인 평등주의.그렇다면, 이러한 엘리트에 대해서 반격을 어떻게 하는가?1. 기회의 평등과 불우한 사람들의 경제적 전망이 개선되도록 애쓰는 것이다. ->복지국가 이륙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의 형태의 원천은 "전문직들이 비대졸자를 업신여긴다." 는 분노이다. 명예, 인정은 분배의 정의과 깔끔하게 분리 될 수 없다. 하지만, 과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공직, 명예라고 여기며, 소득과 부의 배분과는 무관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명예와 부의 배분은 연관있다고 볼 수 있다. 라고 책은 말한다.특정 철학자의 의견을 먼저 이야기를 하고, 그에 대해 반박을 하듯 논지를 이어나가고 있다. 문단과 문단 사이가 멀어서, 자칫 글의 형태를 보기는 힘드나, 집중해서 읽다보면 글의 실체가 드러난다.따라서, 엘리트들이 가진 우월주의, 오만, 없는 자들을 깔보는 형태는 사회규범과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능력주의 = 비하의 의미를 갖고 만들어졌다. 능력주의자가 말하길, 신이 부여한 재능이 허락하는 한 성공할 수 있게 해준다면, 가장 성공한 사람은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다. 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오늘날 생득적 지능은 성공에 있어 큰 관건이 아니다.이러한 발상은 오늘날 가난한 사람과 불우한 사람의 지위를 격하 시키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당이 내뱉는 이러한 담론은 어찌보면, 내재된 대중을 향한 모욕인 것이다.이 부분에서는 능력주의가 과연 공정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하고 있다.능력주의는 세습적 위계질서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부모의 부가 아이에게 끼치는 환경은 결코 공평하다고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하지만, 복지적 입장에서는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 하며, 아이에게 제공되는 것이 평등하다면, 그것은 응당 누릴 자격이 있다. 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계층이동 사다리가 얼마나 넓은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어느쪽이던, 불평등과 차별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능력주의자는 무능력주의자를 멸시하며, 세습주의자들은 그들만의 리그와 기득권을 생산해낸다.중반부 두 파트를 먼저 읽어 보았다.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내 주변에는 상당히 부유하게 사는 친구들이 많다. 이러한 친구들이 이야기 하는 것은 자신들이 이렇게 잘 사는 것은 부모때부터 노력해온 결과이며,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이야기를 한다. 생애 과정에서 부모가 어떤 혜택을 주었고, 어떤 사립 교육을 받았는지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자신의 노력이 아닌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항상 이런식으로 자신의 위치에 대한 정당성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정당성에 대해 다양하게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하며, 기득권 층이 어떻게 자신의 입지를 지켜나가고, 하위계층이 어떻게 계층 사다리를 이용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특히, 미국 명문 대학에서 최하위층의 계층 사다리 이동은 정말 극소수이며, 10명 중에 1명은 2다리를 건너 올라간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굉장히 충격적이다. 미국에서도 대학은 특권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능력주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기때문이며, 더 공평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아직 책을 더 읽어봐야겠지만, 굉장히 흥미롭다.자신이 직접 흙수저의 삶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러한 삶에서 노력을 하면 벗어날 수 있는 양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부모가 이룬 소득을 빼앗기지 않기위해 복지는 없어져야 하고, 세금을 더 낮추고, 왜 우리들이 세금을 내야 하느냐고 핏대를 세우는 애들에게 이 책을 권유해주고 싶다. 어차피 읽어보려고 하지도 않겠지만. 애초에 이미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불평등을 이야기를 해봤자, 그들에게는 이것이 인생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계층, 집단 간에 빈부격차와 양극화
없는 나라 본 적 있으십니까?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에서는
'빈부격차'와 '양극화'는
능력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합니다
응? 무슨말이지?
능력주의의 명암
당신은 한 회사의 CEO입니다
신입사원을 뽑으려고 합니다
사람을 채용할 때
후보자의 어떤 점을 보고 채용하십니까?
대학?
능력?
성실?
대체로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좋은 능력을 갖추었을 것이고
성실하게 일을 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야 대체로 옳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것이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출처 : 11.18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 장면
공정한 사회를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의 인터뷰에서 보듯이
능력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공평히 주어졌을 때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공평한 기회를 갖는
그런 현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부모님
내가 사는 동네
내가 다닌 학교가
다른 사람들하고 다 같을 순 없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행운, 환경 등 여러가지 요소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공정한 사회로 발돋움 할 수 있을까요?
바로, 모든 노동은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지난 2016년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저자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의문을 품고 한번 책으로 써야겠다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를
찾아냅니다
바로
엘리트 계층에 대한
노동계층의 분노 때문입니다
·
·
·
불공평한 기회에 기반한 능력주의는
엘리트주의를 낳았고
노동계층은 이에 분노하는 심리가
은연히 숨어있던 것이죠
트럼프 대통령은
이것을 알고
노동계층의 지지를 얻어내
당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엘리트주의는 '교육'을
빈부격차의 해결의 솔루션으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뒤쳐집니다
대학에 가지 못하면
너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차가운 눈길을 보내는 것이
미국 사회의 현실이었고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 상황 아닌가요?
이번 코로나19로인해
우리는 우리가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배달부
택배기사
의료진들
캐셔
요양원
이 모든 사람들의 노동에 기반해서
사회가 유지되고 지탱하고 있구나
깨달으셔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급여나
존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이 사회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사회적인 명망도
높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사람이 얼마나 돈을 많이 벌고
어떻게 사회에 기여하는가를 기준으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 명예, 성공 등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능력주의로 생긴
편협한 시각이며
학력, 학벌 이외의 자질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며
공공선을 위해 대부분의 시민도
존경, 지지를 받는 분위기를 만들어보자
우리가 지금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탈피하자
이것이 저자의 의도이자
집필의 이유입니다
당신이 이 책을 읽어보고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바람을
가져오길 기대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교수의 최신작입니다.
'공정'이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민감합니다.
공정함을 기대하고 선출된 문재인대통령도 많은 상황에서 공정하지 못함을 지적받고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공정하다고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작은 조직의 장인 저와 제가 속한 조직에 대해서도 성골이니 진골이니, 누구 누구 라인이니 하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저에게 들려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공정함에 목말라 있고, 공정함에 엄격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공정함을 외치고 있다면 사회는 시간이 걸려도 공정한 방향으로 진보할 것이 분명합니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과거와 비교해 분명히 공정해 졌고 아직도 공정해 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책입니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팬더믹이 급습했다.
이로 인해 예상을 뒤엎는 불평등과 정당 사이의 알력이 불거졌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시장과 국제 물류, 유동성 자본으로 이익을 본 이들에게 경제
전망과 정체성은 더 이상 지역이나 국가와 무관했다.
이들은 세계화의 '승리자'이다.
열린 세계에서의 성공은 교육에, 즉 세계 경제 환경에서 경쟁하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 달려있다.
교육의 기회는 반드시 균등하게 관리되고 있고, 성공한 사람은 그럴 만한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말로 교육 기회가 균등했다는 전제 하에, '뒤처진 사람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말도 된다.
서론.대학입시와 능력주의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에 대한 논쟁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는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는냐를 놓고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논쟁은 능력주의의 문제가 더 뿌리 깊은 것일 수 있음은 돌아보지 않는다.
명문대의 입시는 왜 그토록 치열해져서 특권층의 부모들이 조직적인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자녀들을 입학시키게끔 만든 것일까?
입시 문제에 사회가 목을 매는 현상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점점 불평등이 늘어난 데서
기원한다.
명문대에 들어갈 경우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더 커졌다.
명문대는 경제적 불안을 극복하고, '능력주의 광채'를 다르게 해 주었다.
즉, 성공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능력의 지표가 된다.
대학 입시가 능력주의의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정치권의 주요 화두다.
세계화의 승리자들이 자신들은 '얻을 만한 걸 얻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도록 그리고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지도록 바뀌지 않았던가?
1.승자와 패자
민주주의 위기의 시대다.
이러한 위기는 외국인 혐오증이 점점 심해지고, 권위주의적 인물들에 대한 지지
역시 높아지는 데서 느낄 수 있다.
수십년 동안 불평등이 커지고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는 분노를 낳았고, 결국 포퓰리즘적 저항과 트럼프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이는 주류 정당들과 집권 엘리트가 정책을 그렇게 편 결과의 산물이다.
"정부는 문제이고 시장이 해답이다"라는 주장하에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시장 중심적 세계화의 흐름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금융화되고, 그 결실은 대부분
최상위층에게 돌아갔다.
작금의 미국, 영국, 유럽에서 포퓰리즘의 발흥은 일반적으로 집권 엘리트에 대한 반작용이다.
주류 정당과 정치인들은 기회의 평등을 늘림으로써 증가하는 불평등에 대응해왔다.
그러나 현실은 사회적 상승의 가속화가 아니라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다.
능력주의의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결국 보통 시민들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포퓰리즘의 반격을 촉발했다.
그 반격이란 무자비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민족주의를 채워 넣으려는 움직임이다.
2.'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능력주의 사회는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며, 각자 스스로 필요한 것을 정당하게 얻을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능력주의 이상의 어두운 면은, 가장 매혹적인 약속, 즉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자수성가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숨어 있다.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으로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심지어 '우리 삶에서 주어진 결과'라는 말조차 무한 책임론에 일정한 한계를 도덕적으로 부과한다.
운명이 능력의 반영이라는 관념은 서구 기독교 문화의 도덕적 직관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선량하니까 위대하다'는 섭리론에 내포된 능력주의적 색채는 사회적 단결, 개인의 책임, 복지국가 등에 대한 국내적 논쟁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시장친화적 세계화가 유력해질 때 이를 추진했던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옳은 편이고 역사가 자기네 편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3.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요즘 우리는 성공을 청교도들이 구원을 바라보던 방식과 비슷하게 본다.
행운과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성공은 미덕의 증표다.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다.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치열한 입시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힘겨운 노력은 젊은이들에게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심어주고 있다.
평등한 기회와 사회적 상향 이동 보장이라는 이상은 오래 전부터 아메리칸 드림의
일부였다.
미국의 주류 중도우파와 좌파 정당들은 이 이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실현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굳건한 미국은 사회민주주의 유럽보다 덜
관대한 복지국가일 수밖에 없다.
4.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글로벌 경제 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해법은 노동자의 학력 수준을 높여 그들이 경쟁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이 기본적인 도덕적, 정치적 프로젝트 과제였다면 고학력을 이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정책의 제1목표였다.
그러나 불평등과 수십 년 동안의 세계화로 노동자가 떠안게 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직 교육에만 집중하는 일은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하는 심각한 역효과를 낳았다.
노동자를 대변했던 정당들은 갈수록 능력주의 엘리트의 정당이 되고 있다.
민주당이 전문직업인의 정당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는 미국에서 비대졸자 백인
유권자들은 민주당을 외면하고 있다.
영국도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피케티는 좌파 정당들이 노동자 정당에서 지식계급, 전문직업인 정당으로 탈바꿈한
것이 왜 그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불평등 증가에 대응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 준다고 본다.
한편 높은 학력을 못 가진 사람들은 엘리트가 밀어불이는 세계에 반발하고 포퓰리스트, 국수주의자 후보들에게 표를 던졌다.
5.성공의 윤리
능력주의는 모두가 공평한 조건에서 경쟁한다면 그 결과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에서도 승자와 패자는 나온다.
문제는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경주를 시작하느냐 그리고 훈련, 교육, 영양 등등에
똑같이 접할 수 있느냐다.
재능은 노력이 아닌 행운의 결과이다.
그 재능이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는 것도 행운의 결과이다.
능력주의 신념의 매력 대부분은 '우리 성공은 우리 몫'이라는 생각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의 재능이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 인식하면 편견과 특권을 극복하는 것만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능력주의 신념에 회의를 가져온다.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노력은 다가 아니다.
성과가 중요하다.
성과란 재능과 노력의 혼합물이다.
우리는 성공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라 믿고 싶으며,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돈을 잘 버는 일은 그 사람의 능력과도 무관하고 그가 한 기여의 가치와도 무관하다.
성공한 사람이 솔직하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가 뒤죽박죽된 욕구와 욕망 속에서 관리를 잘 해냈다는 것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소득과 권력의 불평등은 기회를 공정하게 평준화한 사회, 또는 가장 불우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사회 시스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라도 불평등이 없지는 않다.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재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성공할 수 있으리라."
능력주의 엘리트는 이 주문을 외우는데 바빠서 그것이 효력 없는 주문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포퓰리즘의 반격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이다.
6.'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능력주의가 문제라면 해답은 뭘까?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하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능력주의는 출생 대신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능력이 없다 여기는
나머지를 격하시키고 비천한 자들이라 멸시하기 쉽다.
능력주의적 입시제도는 세습 특권 귀족제는 능력주의 엘리트층에게 자리를
내주었으며, 성별, 인종, 민족적 차이에 대해 훨씬 관용적인 태도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유동적이며 계층 이동이 활발한 사회를 못 만들어냈다.
미국 대학은 놀랄 만큼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사회적 상승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오늘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의 시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한 필수 코스처럼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만든 잘못된 가치의 틀에 따라, 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선별된 사람들에게는 능력주의 오만과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굴욕감을
심어주는 제도는 바꿔야 한다.
대학에 다니기가 힘들어 보이는 일부 지원자를 솎아내고, 제비뽑기 식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기를 제안한다.
학습능력 저하나, 다양성, 동문 자녀 우대 혹은 기부금 입학, 명문대의 명예 등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지만, 모두 문제없거나 무시 가능한 수준의 문제이다.
이런 변화는 능력주의의 폭정이 승자에게 미친 악영향을 줄여줄 것이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하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에게 능력주의의 폭정은 대학 간판을 따기 위한 영혼까지 끌어대는
경쟁이라기보다,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올 '경제적 보상도 적고
사회적 명망도 없는 직업 세계'라는 현실이다.
우리는 보다 넓게는 4년제 대학 학위가 없어도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관공이나 전기 기술자, 치과 위생사 등이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은
공동선에 기여하는 훌륭한 과정으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7.일의 존엄성
지난 40년 동안 대졸자와 고졸자의 수입 격차는 두 배로 늘어났다.
세계화 시대가 고학력자에게는 많은 보상을 해주었지만,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불행감에 시달리는 건 이상할 게 없다.
경제적 곤경만이 아니다.
더 악날한 상처는 일의 존엄성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시장이 승자에게 퍼붓는 과도한 보상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비대졸자
노동자에게 던져 주는 쥐꼬리 만한 보상도 당연시했다.
우리 사회에는 '우리가 버는 돈이 우리의 사회적 기여도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내려버렸다.
결국 노동의 존엄성도 깍아내려, 엘리트에 대한 분노와 정치적 반격에 불을 지폈다.
비대졸 노동계급원들은 도널드 트럼프에게 몰표를 안겼다.
노동계급과 중산층 가정의 구매력을 높여주는 것으로 그들의 곤경을 보상하려는 정책 대안, 또는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도모하는 정책 대안 등은 지금 한창 불붙고 있는 분개와 분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노동계급의 분노를 직접 촉발한 상처는 그들이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트리며,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보수적 관점에서 미국에서 노동의 존엄을 일신하려면 자유시장에 대한 전통적 선호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저 소득 노동자에게 임금을 보전하고, 소비자가 아닌 노동자의 입장에 서서, 무역과
아웃소싱, 이민 등에 어느 정도의 규제를 두는 편이 정당하다.
'GDP극대화에서 일의 존엄과 사회적 응집에 친화적인 노동 시장 조성'으로 우리의
주 관심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진보적 관점에서는 금융의 역할이 증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금융업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선진경제체제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다.
그러나 지금의 금융은 생산적이지 않다.
실물경제의 생산성을 높이기 보다, 비생산적인 불로소득을 창출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현대 금융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금융을 개혁하려 한다.
노동에서 소비와 투기로 조세 부담을 넘기려는 움직임은 세금 제도의 개선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할 수는 없다.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승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능력주의적 신념은 사람들의 연대가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 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있다.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그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이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저 또한 `공정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혀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운 좋게 비교적 안정된 직장에서 오랜 기간동안 일을 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정말 궁금하고 걱정도 됩니다.
우리 사회를 다루는 다수의 책들이 이야기하는 봐는 결국 같은 해답을 제시합니다.
더불어 살아가자고 말입니다.
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우리의 살아가는 방식은 지금과 같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대로 방치한다면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더욱 더 극명할 것이고 승리의 전리품은
소수의 승자에 더 집중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각해, 스스로 변화하지 못한다면 다음에 우리를 기다릴 존재는 트럼프가 아닌 히틀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 사회에 정의 열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이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지난가을 출간한 새 책은 ‘능력이라는 폭정’(The Tyranny of Merit)이란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
능력주의가 더는 공정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폭정의 얼굴을 하고 사람들을 억압한다고 진단한다.
성공이 오로지 개인의 노력에 좌우된다는 믿음이 잘못됐다는 저자의 지적은 사실 새롭지 않다.
부모 잘 만나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스펙 잘 쌓은 아이가 명문대 들어가 신(新)특권층화한다는 비판도 이미 숱하게 제기된 문제다.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시작된 ‘시장 주도의 세계화’가 보통 사람들에겐 무익했거나 더 나아가 생존권을 위협했다는 지적도 새롭지 않다.
그런데도 이 책엔 민주주의의 성숙과 안착을 바라는 이들에게 일종의 각성을 촉구하는 미덕이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직접적인 위기는 포퓰리즘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영국 브렉시트 투표가 가결된 2016년을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일대 반격을 가한 해로 꼽는다.
세계화의 온갖 과실을 수십년 독점해 온 엘리트들을 향해 민초들이 벌인 분노의 복수극이란 것이다.
당시 대선에서 대학 학위 없는 백인 유권자 3분의 2가 트럼프에게 몰표를 던졌다는 사실은 이 반란이 도덕적으로 온당한지 따지는 행위를 무의미하게 한다.
오직 포퓰리스트 득세와 민주주의의 타락을 막는 실질적인 조치만이 유효할 뿐이다.
영국기 문양 옷을 입은 남성이 지난 1월‘안녕, EU’라고 쓴 종이를 들고 브렉시트 축하 시위를 하고 있다. 브렉시트는 엘리트 독식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능력주의 세상에서 패배한 이는 실패를 오로지 ‘자신이 못난 탓’으로 돌리는 모욕까지 떠안는다.
이로 인한 좌절과 분노가 승자의 오만과 충돌하면 민주주의의 근간인 연대를 훼손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코로나 19 사태를 맞아 미국이 보인 혼란과 반목, 공공선의 실종 근저에도 연대 의식의 훼손이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 성쇠는 연대 의식 회복 여부에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유주의에 근거한 하이에크의 경제 사상과 존 롤스의 정의론을 반박하면서, 계층 간 이동성만 강조하는 능력주의는 근본적으로 평등의 가치를 외면하기 때문에 정의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앙으로도 비판을 확장, 직업적 성공을 구원의 징표로 여기는 칼뱅의 소명론과 번영을 은총의 증거로 보는 섭리론에도 능력주의 사고가 깃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능력주의는 가난한 이들만 비참하게 할 뿐 아니라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승자마저 포박한다는 점에서 모두를 패자화한다.
어떻게 능력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우선 ‘승리에는 운도 따랐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그래야 가진 자들 맘대로 세상을 주무르고 전리품을 독식하는 능력주의의 폭정을 멈출 수 있다.
교육 제도를 개선하고 일의 가치에도 차별을 두지 말자고 촉구한다.
특히 명문대가 앞장서 제비뽑기로 학생을 선발하자는 제안은 혁명적이다. 다만 수학 능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니 기준 성적을 정한 뒤 10배수를 선발하고 이 중 추첨으로 합격자를 정하면 명문대생이라며 뻐기지도, 못 들어갔다고 자책하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민주주의는 자유주의가 환호하는 기회의 평등도 사회주의가 맹신하는 결과의 평등도 아닌 조건의 평등을 통해 추구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 의회 도서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남녀노소, 피부색, 빈부 차이를 떠나 모두가 만날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사람들은 다양성을 인식하고 더불어 살아가며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다고 한다.
유능한 관료가 오히려 민주주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눈길을 끌지만 우리 사회에 적용하긴 어려워 보인다. 한국에선 포퓰리즘에 물든 정치인이 관료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온갖 비효율을 양산하고 있지 않은가.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164~165쪽
<정의란 무엇인가>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신간이 곧 출간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지난주 동네 책방에서 이 책을 보는 순간 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페이지를 넘기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어제 저녁부터 본격적으로 집중력이 발휘되었다. 미국 대학의 부정 입학에 관한 사건과 사 년 전 트럼프가 미국의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까지만 해도 막힘없이 술술 잘 읽혔는데, 그 이야기들이 능력주의에 대한 설명과 비판 그리고 철학적 담론으로 이어지면서 읽는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개최되는 가장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12월 3일에 예정된 대학수학능력시험이다. 대학 수시 모집에 응시해서 합격한 학생들을 제외하고, 대학 입학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들이라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시험인데, 그날 시험 성적에 따라서 개인 운명의 향방에 결정된다고도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시험을 주관하는 교육부에서도 모든 학생들이 최대한 동일한 조건과 환경에서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고, 모든 학생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개인이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고 있는데, 어찌 보면 시험 성적에 따라 개인의 가치가 평가되는 것처럼 보이는 제도이기도 하다.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들이 경쟁률이 높은 상위권 대학들에 입학 지원을 하고, 그 대학들을 졸업한 학생들은 사회에 진출할 때 다른 사람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곤 한다. 이러한 현상은 능력주의의 한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미국의 정치 분야에서도 최근 40여 년 동안 능력주의가 큰 흐름을 이루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능력주의는 사회적 연대를 약화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 높은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걸 가로막고, 학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노동의 소중함을 망각하게 하고,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의 민주적인 논의보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신뢰를 부여해 왔다고 주장한다.
상위권 대학을 졸업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에서 석사나 박사와 같은 전문적인 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정치 분야에 더 많이 진출해 왔고,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처럼 좋은 능력을 가진 그들에게서 훌륭한 정치를 기대해 왔지만 세상은 오히려 능력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이 더 증대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능력에 대한 오만한 감정을 갖게 되었고, 실패한 사람들은 무능력과 좌절을 경험했다. 그 결과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끓어올랐고, 그들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잘 활용한 사람이 바로 트럼프였다. 그리고 엘리트들은 능력주의에 대한 오만에 사로잡혀서 아직까지 지난 대선의 패배 원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직 이 책의 논지를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지만, 내가 보기에 마이클 샌델은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훌륭한 정치는 전문적인 지식과 높은 학력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말이다.